조선 초기의 명인 황희 정승이 젊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어느 날 시골길을 가노라니 한 노인이 누런 소, 검은 소 두 마리 소에 멍에를 메워 논을 갈고 있었다. 쟁기 하나에 두 마리를 맨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두 마리 소가 나란히 쟁기를 끄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던지 황희 재상이 노인께 물었다. “노인장. 저 두 마리 소 가운데 어느 소가 더 힘이 세오?” 그러자 노인이 대답하기 어렵다는 듯 한동안 머뭇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황희 정승 옆으로 다가와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말로 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실은 검은 소가 조금 더 세다오.” 노인의 말을 들은 황정승은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말을 굳이 귓속말로 그처럼 어렵게 들려주는 이유가 궁금하여 노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말했다. “내가 큰 소리로 말하면 저 두 마리의 소 귀에 내 말이 들릴 것이 아니오. 그러면 아무리 짐승이라 한들 저 누런 소가 듣기에 좋겠소?” 그래서 황희 정승이 노인의 이 말을 듣고 크게 각성하여 평생 말을 조심하는 교훈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황희 재상은 18년 동안 영상직을 수행했고 청백리의 표상으로 역사에 이름을 드리운 분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고명한 이도 이름없는 노인에게 정문일침(頂門一針)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 위 이야기의 주제이다. 어디 법석에서 주장자를 잡고 고상한 말을 해야만 꼭 훌륭한 법문이 될 것인가. 위 이야기 속의 노인이야말로 누구 못지 않은 인생 스승이 아닐까. 지금의 우리 현실을 고려할 때 이 말이 주는 울림은 더욱 크고 절실한 바가 있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무한한 말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전에 없이 풍성한 말의 홍수 속에 묻혀 살고 있기도 하다. 문서에서 전화로 발전한 말하기가 인터넷으로 발전하고, 다시 모바일 전송으로까지 나아가면서 말 전달의 생산과 수요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반영이나 하듯, 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최고 지도자가 보여준 것이 곧 방송에서의 토론 모습이었다.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여 여러 방송매체들의 토론 프로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시청자를 토론의 장에 적극 끌어들이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여론 일각에서는 오로지 토론만 무성하고 실천이 없는 이런 현실을 나토(NATO: No Action Talking Only)라고 비꼬기도 하지만 어떻든 현 정부는 적어도 말에 의한 국민참여라는 점에서는 분명한 변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이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1970 ~ 80년대의 상황에 비하면 오늘의 이런 현실은 가히 말하는 자유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고 하여 좋을 듯하다. '80년대 초 어느 날의 일을 필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동학사 못 미쳐 어느 음식점 마당에서 술김에 ‘전○○은 자폭하라!’라는 고함을 소리높이 지른 적이 있고, 그 소리에 놀란 가게 주인이 내가 당신을 기관에 신고하지 못할 줄 아느냐며 겁을 주듯 말한 적이 있다. 말 잘 못해 잡혀가고 글을 잘 못 써서 기관에 가 조사를 받아야 했던 것이 20여 년 전이었다. 오늘날 백주에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욕한다 한들 누가 잡아갈 것인가.

....3공 시절은 그만두고라도 5공 시절과 비교한다고 해도 지금의 우리 사회는 말하는 자유의 요순시절이라고 하여 좋을 듯하다. 그만큼 민주주의 사회로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는 좋은 증거가 아닐 수 없다.

.... 하지만 이처럼 우리 시대가 말하는 자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면에는 말하기 예절의 부재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맹점을 함께 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자유가 지나쳐 나만 알고 상대는 모르며, 편리만 좇을 뿐 예절이 없고, 욕구의 분출은 강한데 비하여 절제는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날 수많은 인터넷 싸이트는 말하기의 자유를 빙자한 공격과 욕설언어가 난무하는 말의 쓰레기장이 되고 있다. 얼굴과 목소리가 감춰져 있다고 하여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손전화 사용이 일반화된 것도 이미 오랜 전 일이지만 말하기 예절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보인다. 아무데서나 전화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대화 중에 상대방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화기에 말을 하는 태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차 속에서, 길을 걸으며, 공공 장소에서 손전화를 거리낌 없이 받고 말한다. 기계에 의한 개인적 말하기의 편리만을 추구할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공공사회의 이익과 말하기 예절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말하기에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에 뿌리를 둔 결과이다. 나만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으니 거친 말, 공격적인 말, 비꼬는 말, 욕설 담긴 말이 좀처럼 정화되지를 않는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따르게 되면 자연히 부드러운 말, 점잖은 말, 간접화된 말, 다듬어진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지난 3월 11일에 빚어진 모 건설회사 사장의 투신사건은 이러한 예를 보여주는 생생한 교훈이 될 것이다. ‘○○건설 사장처럼 좋은 대학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고통치자의 이 말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큰 모멸감을 줄 수 있을 지는 아무리 모자란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직설적인 말하기가 때로 얼마나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준 일대 설화(說禍)사건인 셈이다.

....총선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이래저래 말의 자유가 곳곳에서 더욱 넘쳐나는 때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말하기의 자유보다 말하기의 예절과 절제력을 보여주는 것이 소중한 시점이다. 그럼으로써 말하기 자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야 할 때이다. 황희 정승 일화 속에 나오는 노인의 말을 오늘날에 되새겨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